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이트 형제 (문단 편집) == 알려지지 않은 수난 == 보통 [[위인전]]에 잘 넣지 않은 게 이들의 고생담이다.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미국 과학계는 축하보다는 분노와 시샘을 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형제를 방해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라이트 형제가 직접 찾아가 가르침까지 구했던 새뮤얼 랭글리(Samuel Langley, 1834~1906) 박사[* 버지니아주에 소재한 NASA 랭글리 연구소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왔지만 같은 주의 CIA가 위치한 동네도 있어서 아주 유명하지는 않다.][* [[캐터펄트#s-2|최초의 항공기 사출장치]]를 제작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랭글리(항공모함)|미국 최초의 항공모함]]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따왔다.]였는데 스미소니언 과학협회 간부이기까지 해서 당시에는 명망있는 학자 중 하나였다.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한 랭글리는 이미 1897년부터 동력 비행기 개발에 힘을 기울여왔는데 듣보잡인 아마추어 형제들이 자신을 제쳐두고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하필이면 1899년 라이트 형제가 랭글리 박사를 찾아와서 가르침과 자문을 받는 와중에 동력 비행기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에, 랭글리 박사는 "나의 연구 성과를 허접스런 두 잉여놈들이 무단으로 훔쳐갔다!"라고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게다가 1903년 12월 8일 겨우 아흐레 전, 랭글리 박사는 동력 비행기 시험비행에 나섰다가 추락했기에 자신이 실패하고 라이트 형제가 성공했다는 것도 믿지 못했다. 애시당초 라이트 형제의 방식과 랭글리 박사의 방식은 매우 달랐다. 랭글리 박사는 새나 비행선을 참고하던 다른 도전자들과 다를 게 없었지만 라이트 형제가 참고한 것은 선박과 물이었다.[* 그래서 조선 과학기술자들은 비행기와 은근 관련성이 높다.] 사실 라이트 형제는 새뮤얼 랭글리에게만 지식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글라이더 연구가인 독일인 오토 릴리엔탈 같은 사람들도 라이트 형제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솔직히 말하자면 새뮤얼 랭글리가 발광한 이유도 라이트 형제가 제자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토머스 에디슨]]도 경쟁자들에게 배우기도 하고 협력 및 도둑질을 하기도 했으나 서로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1904년 7월. 랭글리 대 라이트 형제의 대결이 벌어진다. 둘이 동력비행기를 타고 2만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누가 잘 날아가나 시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라이트 형제 완승. 랭글리의 비행기는 힘없이 강물에 추락했지만, 라이트 형제가 탄 비행기는 잘만 날아갔다. 그것도 '''15분씩이나 400미터 위를''' 쌩쌩 날아갔기에 미국 언론은 이번이야말로 "라이트 형제 하늘을 날다!"라고 확인 보도를 해버렸다. 결국 랭글리는 패배에 좌절하여 모든 활동을 멈추고 폐인처럼 지냈으며, 평생 라이트 형제를 원수로 여기고 이를 갈다가 오래가지 못해 [[홧병]]으로 죽게 된다. 랭글리 박사는 죽기 전에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라이트 형제를 이겨서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후술할 랭글리의 제자 박사들이 한 행보로 봐서는 근거가 있는 듯하다. 랭글리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스미소니언 과학협회는 스승인 랭글리 박사가 당한 굴욕에 복수를 하겠다는 십상으로, 라이트 형제가 랭글리의 아이디어 및 여러가지를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라이트 형제는 1년이 넘는 온갖 조사와 수사를 받아야 했다. 물론 결과는 무죄. 어떤 증거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똑같다면 왜 랭글리 박사의 비행기는 추락하고 두 형제가 만든 비행기는 잘 나는데?"''' 라는 결과가 이를 입증했던 것. 이렇게 무죄가 입증되고 이들은 계속하여 여러 단점을 고쳐나가면서 개량된 비행기를 만든다. 1905년에 이들이 플라이어 1호기와 2호기의 비행을 통해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량한 '플라이어 Ⅲ'은 선회·방향전환·원운동·8자비행이 가능했고, 30분 이상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럼에도 스미소니언 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도용했다고 정계, 재계, 학계, 인맥에 라이트 형제를 까내리는 흑색 선전을 계속했고 이런 여파로 인해 이들이 만든 비행기는 일절 팔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이들은 [[미 육군]] 측에 시험비행도 여러번 했지만 육군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당시에는 공군이 세상에 없었는데 세계 최초로 전투기를 따로 군대를 조직한 나라는 다름아닌 [[오스만 제국]]이었다.] 되려 유럽이나 [[아르헨티나]](당시에는 세계적인 경제부국이었다.), 심지어 [[오스만 제국]]이나 [[일본]]에서까지 관심을 보이며 생산공장을 자국 안에 만들자고 온갖 조건을 제시하며 유혹했다. 그런 가운데, 라이트 형제를 꾸준히 지지하던 옥타브 샤뉘트가 조국이었던 프랑스에 열심히 이들을 알렸고 동력 비행기에 대한 걸 홍보한 끝에 결국 [[1908년]]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 공장을 만들게 되었고''' 미 육군은 제시하는 시험비행을 성공시키면 구입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시험비행을 성공시켰지만 그럼에도 여러 조건이 안 맞는다면서 거부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생산에 주력하지만 결국 공짜는 없다는 듯이 제조기술이 유출되어버린다. 이 일로 프랑스는 독자적인 비행기 제작에 들어가고 더더욱 새로운 기술 등에 여러 모로 노력하면서 라이트 형제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때 앞서 말한 두몽과의 최초 발명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유럽에서는 1903년의 첫 비행 등이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10여 년간 스승이자 친구였던 옥타브 샤뉘트가 기술 유출에 연루된 게 드러나서 라이트 형제와 샤뉘트는 엄청 다툰 후 결국 갈라섰다.[* 옥타브 샤뉘트와의 관계는 이미 라이트 형제의 성공에 대해 얼마만큼 그가 기여했는지를 두고 사이가 삐그덕거리던 상태였는데, 재판 후 샤뉘트가 라이트 형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라이트 형제가 샤뉘트의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끝장났다.] 이런 와중에 미국에선 글렌 커티스(Glenn Curtiss, 1877~1930)라는 후발주자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와 어느 정도 비슷한 기술로 뒤늦게 특허를 낸 후에 공장을 차렸고 오히려 라이트 형제가 자신의 기술을 도용했다고 [[소송드립]]과 선동질을 하며 라이트 형제를 비난하고 몰아붙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조국인 미국은 커티스의 주장에 동조하였고, 많은 사람들도 커티스가 라이트 형제를 향해 반박하는 논조에 따라주는 바람에 원조인 라이트 형제가 되레 온갖 고생을 해야했으며, 기나긴 소송이 시작되었다. 소송을 맡았던 것은 형인 윌버였는데 잦은 여행과 재판으로 인해 건강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1912년]] [[보스턴]]으로 사업차 여행을 다녀온 후에, 티푸스 열 진단을 받았고, 몇 주 동안 의식을 잃었다 회복했다를 반복하다가 끝내 45세라는 아직 한창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다 [[1914년]]에 미국 상급 법원에서는 겨우겨우 라이트 형제가 무고하다고 판결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언론과 사회에서 "라이트 형제가 기술 [[독점]]을 위해 커티스를 괴롭혔고, 재판을 유리하게 몰아 커티스의 기술도 빼앗아 탐욕을 부린다!"라고 기사화를 하여 맹비난을 퍼붓게 된다. 커티스의 항의와 소송으로 고생해 온 라이트 형제에게 이제는 커티스를 괴롭힌 가해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